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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서평)

한강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서평

by 머니바다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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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시집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서평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시인이자 소설가로서의 그녀의 문학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집은 첫 번째 시집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내면세계를 더 가까이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강은 소설에서 보여준 그 특유의 섬세한 감정 표현을 시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보다 서사적인 구조로 감정을 풀어냈다면, 이 시집에서는 훨씬 더 농축된 언어와 이미지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각 구절이 마치 시간과 공간을 멈추게 하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시집 제목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매우 상징적이다. 저녁이라는 시간, 서랍이라는 공간은 모두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는 것들이지만, 한강은 이 둘을 결합해 한 편의 시적 세계로 승화시킨다. '저녁'은 하루의 끝, 어둠이 찾아오기 전의 짧은 순간을 의미하고, '서랍'은 우리가 감정을 보관하는 은유적인 공간처럼 느껴진다. 시인이 서랍 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것은, 하루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감정의 잔해들을 차곡차곡 숨겨두고 그것을 시로 끄집어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침묵과 고독을 다루는 방식이다. 한강의 시들은 고요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시에서 느껴지는 고독감은 단순히 외로움의 차원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고독을 담아낸다. 이는 그녀의 소설에서도 자주 다뤄졌던 주제이지만, 시에서는 더욱 응축된 형태로, 그 감정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시를 읽다 보면 마치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감정의 밀도가 높다.

 

또한, 한강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남다르다. 그녀의 시에서 발견되는 언어들은 매우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폭발력은 대단하다. 그녀는 불필요한 수식어 없이도 독자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일상적인 사물이나 풍경을 통해 큰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능력은 그녀의 시적 세계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표현 자체가 일상적이면서도 그 속에 담긴 감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삶과 죽음, 그리고 상실의 이미지는 이 시집 전반에 걸쳐 주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한강은 인간이 마주하는 삶의 한계와 고통을 직시하며, 그 안에서 길어낸 감정들을 시로 풀어낸다. 죽음은 특히 그녀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순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녀의 시를 통해 독자는 인간이 겪는 상실과 그 상실 속에서 찾아오는 어떤 형태의 해방감을 마주하게 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또 다른 점은 한강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매우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그녀의 시 속에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다. 바람, 나무, 바다 같은 자연의 요소들은 그녀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고, 그 속에서 위로를 찾기도 한다.

 

결국,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한강이라는 작가의 깊은 내면과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농축한 작품이다. 이 시집은 독자에게 단순한 감정 전달을 넘어, 그 감정에 함께 잠기고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더듬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여정을 떠나게 된다. 한강의 시는 한 번에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발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오래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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