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희랍어시간> - 서평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을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깊은 여운 속을 걸었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조용히 던져진 돌멩이처럼, 이 소설은 내 마음속 어딘가에 울림을 남기고 그 파장이 오래도록 번져 나갔다. 언어를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이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침묵과 교감의 이야기는 언뜻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존재와 소통, 그리고 상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는 과거에 말을 잃은 경험이 있다. 그녀는 이혼 후 아이의 양육권을 잃고 다시 한번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이 침묵은 단순히 소리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진 고립의 상태이며, 자신의 존재마저 흔들리게 만드는 깊은 고통의 상태다. 그런 그녀가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한다는 설정은매우 흥미로웠다. 더 이상 살아있는 언어가 아닌, 이미 잊힌 고대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녀가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 선택한 독특한 방식이었다. 마치 그녀의 상실과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희랍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려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그 또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는 시각을 잃어가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점점 더 어둡게 변해가는 것을 체감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도 그는 어딘가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여자에게 희랍어를 가르치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다. 여자가 희랍어 단어를 처음으로 발음하는 순간, 그 소리는 마치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그녀는 그 소리를 통해 침묵의 벽을 깨고 세상과 다시금 연결되고자 했다. 그 순간,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단단한 결의를 느끼게 된다. 말이라는 것이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닌,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남자가 점차 시력을 잃어가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다. 어둠 속으로 점차 걸어 들어가면서도 그는 오히려 자신의 내면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빛을 잃어가는 과정은 그에게 있어 두려운 일이었을 테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는 여자를 이해하게 되고,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이는 시력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히 눈앞의 세상이 흐려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과정은 남자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이었으며, 그로 인해 그는 여자의 침묵과 그 안에 담긴 깊은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희랍어는 이들에게 있어 단순히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실된 과거와 기억을 되찾기 위한 열쇠와 같은 존재였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워나가면서 자신을 되찾고, 침묵 속에서 소리를 되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여정처럼 보였다. 이 과정은 그녀에게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여정이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희랍어를 가르치면서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고, 그 상처를 감싸주고자 한다. 이들의 교감은 말없이도, 그저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런 침묵 속에서 오히려 가장 깊은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느껴진다.
한강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말을 하고, 왜 말을 잃게 되는가? 침묵이란 소통의 부재인가, 아니면 가장 깊은 소통의 형태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소설 속에서 여자의 침묵과 남자의 어둠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특히 남자가 여자의 침묵에 처음으로 다가가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은, 우리가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무언가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속에서 희망의 조각을 발견하고자 한다.
한강의 문체는 매우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그녀의 글은 마치 시처럼 감각적이며, 독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파고든다. 그녀가 묘사하는 빛과 어둠, 침묵과 소리의 대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빛을 잃어가는 남자의 시각적 묘사와, 침묵 속에서 소리를 되찾아가는 여자의 감각적 묘사는 매우 섬세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을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남자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희랍어 수업을 이어가며 여자를 돕고자 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큰 감동을 준다. 그는 자신의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여자가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되찾도록 돕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가장 깊이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또한, 이 소설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언어란 우리 존재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과정은, 언어가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희랍어를 배우며 과거의 상처와 마주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금 세상과 나누기 시작한다. 남자 역시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그녀를 도우며,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한다.
『희랍어 시간』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상실과 치유, 고통과 회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한 편의 시와도 같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상실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찾아야 하며, 침묵 속에서도 소통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여자가 희랍어 단어를 발음하며, 그 단어가 그녀의 목소리로 세상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 작은 소리가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녀를 다시 세상과 연결시켜 준다.이 장면은 마치 거대한 침묵 속에서 작은 빛이 켜지는 순간처럼, 독자의 마음속에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소설을 덮으며, 나는 상실과 치유, 그리고 인간의 소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를 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소통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침묵과 어둠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서로를 돕고자 했던 모습은 진정한 소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한강은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언어의 힘과, 그 언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희랍어 시간』은 인간의 상실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의 조각들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한강의 서정적인 문체와, 그녀가 만들어낸 두 인물의 깊은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우리가 상처를 마주하고, 그 속에서 빛을 찾으며, 다시금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인간의 존재와 소통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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